오늘밤에~

역사자료 2008. 1. 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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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밤,그대 모습이 자꾸 내곁에 다가와, 그만 흐르는 눈물 감출 수 없어 ,온통 베게만 적시었네,오늘밤
웬일일까 ,잠못 이루겠네,하얀 종이위에 쓰여진 그대의 글씨,이젠 안녕이라는 그대의 말이였나,
오늘밤,두눈가에 눈물 흐르는데-규리-오늘밤.

1231년 9월 세계를 제패한 몽고군이,고려를 치기위하여 전사상 유래없는 잔혹한 몽골기병 3만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하였다.이당시 몽골기병 3만은,당나라군대 300만명보다 더 강력한군대라구 볼수있수있으며
몽골이 러시아정벌에 가동한 기병이 3만명정도였던것을 보았을때,몽고기병 3만은 그당시 세계최강의
군대라구 볼수있었다.순수 몽골기병은 많아봐야 10만명정도를 유지할수있었던 몽고가 세계를 제패한
것을 보았을때,그 위력과 공포는 상당했을것이다.

중국두 망하구,러시아두 망하구,이슬람,헝가리,유럽등 몽고군이 가는곳마다,패망하지않은 나라가 없었다.
끝까지 저항한 나라는,몽고기병이 살아있는 생명은 풀한포기,돌하나 남기지않구 완전히 패망시켜버리는
그러한 몽고기병을 상대로 무려 30년간을 끝까지 항쟁하여,고려라는 나라의 국체를 지켜내었다.

이러한 끈질긴 항쟁은 세계전사에 드물뿐아니라,그렇게 저항한 나라를 온전히 국체를 보존하게
해준것두 징기스칸의 군대특성을 보았을때,특이한 사례라구 볼수가 있다.

이러한것은 몽골기병이 마음씨가 좋아서 그랬던것이 아니라,그에 맞서 강인한 항쟁의식을 보여주었기에
힘으로 일시적으로 굴복시킬수는 있어도,지배할수는 없는 민족임을 깨달았기에 그렇게 한것이다.

1231년 9월 훗날 승장인 김윤후에게 죽임을 당하는 몽고기병 총대장 살리타이의 몽골 3만기병이
고려를 침략하였다.이때 고려군의 항쟁의식을 대표적으로 보여준것이 귀주성전투라구 볼수가있다.
몽골기병이 빠른기동력으로 방어거점인 성들을 함락시키구,저항하는 성들은,엄청난 살육을 전개하면서
여러부대로 나누어 일부는 개경으로 진격하구,부대중 1만기병을 이끈 살리타이군이 귀주성에 당도하였는데,
이때 귀주성에는  4-5천명의 고려군이 있었다.그중에 대부분이농사를 짓다가,군인으로 변한 농민군들이
대부분이었기에,적의 수적우위뿐만아니라,저항하면 모두살육했다는 그러한 소식들을 들었던 몽골기병들이
성을 에워쌓기에,공포심은 극도로 달했다구 볼수가 있다.

귀주성에는 김경손이라는 사람이 있었다.싸워보기두전에,성내의 사기가 꺽인걸보구,결사대를 규합하여
오히려,성문을 열구나가,기습적으로 몽골군을 공격하였는데,뜻밖의 공격을 받은 몽골군은 의외의 반격에
적전분열이 되었다.전투에서는 숫적우위가아니라,죽기살기루 달려드는 사람한테는 몽골기병두,어쩔수
없다는점이다.수십명의 기병으로,수천의 몽골기병을 치러 성밖으로 나갔다는 자체가,대단한 정신력이라
아니할수가 없다.이렇게 서전에서 상대방의 기를 꺽어 당당히 싸워이기는걸본 성내의 군민들의 사기두
올라가게 되었다.

9월 초순에 시작된 귀주성전투가 10월이 넘어가도록,함락시키지 못하자,몽고군의 피해두 많아졌기에
몽고군은 성의 함락되면,모두 도륙하기전에,항복하라구,사자를 보내었지만,성내의 고려군은
사자의 목을 베어 결사항전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이에 몽고군이 사력을 다하여,발석차를 이용하여 돌을 날려 성벽을 부수면,성내의 군민은 혼연일체가
되어,무너진곳을 다시쌓구,여의치않으면,몸으로 성벽을 대신하여 막으면서 11월이 다가도록 항전을
하였다.성안의 화살과 무기가 다떨어지면,주위에있는 돌을가지구 싸웠구,돌마져없으면,끊는물을 만들어
무기로 사용할만큼 이미 함락되두 모두죽을것이구,가만히 있어두 죽을것이구,이판사판인 상황이었다.

성내의 항전의 결사적이었기에,몽고군은 몽고와 고려가 강화협상이 진행되구있으므로,항복하라는
고려왕실의 항복권고사절을 동행하여 보내었으나,성안에 군민은 죽임은 있어두,항복은없다라는 자세를
취하였다.해를 넘겨 1232년이 되어,몽고와 고려의 강화협상이 타결되었어두,귀주성이 항복하지않자
몽고군은 고려정부에 귀주성이 항복하지않으면,강화협상두 끝장이라는 협박과함께,귀주성에 대한
총공격을 단행하였다.

몽고군이,강화협상이 타결되었음에두,항복을 강요하는 이유는,귀주성은 거란의 30만대군이 고려의
수도인,개경까지 깊숙히 침입했다가,퇴각하던중,강감찬장군에 의하여,귀주에서 거란군이 퇴로가
막혀 몰살당한 역사적기록이 있었다.이러한 사실을 잘알구있는,몽고군이였기에,안전한 퇴로를
확보하기위해서두,강화협상타결은 고사하구,고려왕조의 어명조차거부하는 귀주성의 군민은
목에 가시일수밖에 없었다.귀주성에 발이묶여 더이상 전진하지못한 살리타이는,개경근처까지
깊숙히 진입한 타부대를 동원하여,고려왕조를 위협하구,귀주성이 항복을하지않으면,강화협상은
무효구,재차 공격하겠다는 협박을 하므로,고려왕조에서는 다시 어명을 지닌 관리를 귀주성에
몽고군과함께 보내어,항복하도록 권고하였다.

성안에 당도한 정부관리의 항복권고에두,성안의 군민은 결사항전의 자세를 굽히지 않으므로
어명을 받든,정부관리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므로,자결하려구하였다.이에 성안의 책임자가
항복을 받아드려,강화를할수밖에없는 나라의 처지를 이해하구,출성하여 항복을 결정하자
성안의 남.녀노소가 울지않는사람이 없었다.

막대한 인명과 재산의 피해를 당한 백성들의 분노는 극에달했으나,어쩔수없이,몽고군의 안전한
퇴각을 바라볼수밖에없었다.이후에두 30년이 넘는기간동안,몽고와 고려의 전쟁은 지속되어지만
전쟁기간이 길어질수록,항쟁의식은 더욱깊어졌으며,이러한 백성들의 항쟁의식은 나라의 국체를
지켜내는 원동력이 되었을뿐만아니라,원의 부마국으로,원황실의 공주를 고려의 왕의 아내로
맞이하는 제도가 생긴것두,고려인이 중국한족보다,높은계급을 부여받은것두,작지만 굴하지않는
민족성에 기인한것이었다.

원나라인 몽고황실은 몽고족이아니면 황제나 황후가 될수없었는데,원황실에서
몽고족이아니면서 황후가될수없는데두,또한 유일무일하게 이민족이면서 원황실의 황후가된것두
우리나라의 기황후가 유일했다.세계를 제패했던 몽고가,유독 자그만한 나라인 우리나라만큼은,신경을
많이 썼다는걸 알수가있다.우리나라가 몽고에 등돌리자,우연인지몰라두.원나라가 망한걸보면
우리나라는 작지만,강대국의 틈바구니속에서두,오뚝이처럼 살아남아,캐스팅보트를 쥐는 지정학적
위치에 있음을 알수가있다.우리나라를 만만히 봤다가는,세계를 제패한 국가두 꼼작없이 덕분에
망한다는 수많은 역사기록이 보여주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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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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