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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개소문의 행적과 이미지는 다양한해석이 가능하지만,그사람의 공이나 전술등의 면에있어서는 제대로 알려져있지않다.

연개소문에대한 공에대한 기록은 달랑 2줄밖에없다.
삼국사기의 보장왕21년(662)에 기록되어있다.


"21년 봄 정월, 좌효위 장군 백주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개소문과 사수 언덕에서 싸우다가 그의 군사가 전멸하였다. 효태도 그의 아들 13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소정방은 평양을 포위했다. 그 때 마침 폭설이 내렸으므로 그들은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역사란 문장구절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그당시 시대적상황을 고려하여 전체적인 문맥을 이해하구
풀이해야한다.세계3대해전의 한사람인 도고헤이아치로 제독두 실전사령관은,수도나 궁성에 머물러
지휘하는게아니라,직접 현장에서 지휘했다는것이다.또한 당나라 장군 이세적을 보더라두,
옛날의 장군들은 80살먹었더라두,현장에서 싸우지,수도에 머물며,현장의 군을 지휘하지않는다는것이다.


그런데,유독 연개소문은은 실전사령관이었는데,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에서 연개소문이 위치는
언제나  평양성에서 지휘했을것이라는 어리석은추정에서 사수대첩의 의미가 축소되구있다.


사수는 평양성근처에 위치해있지않았으며,연개소문은 고,당전쟁시 수도평양에서 머물면서
지휘했다는 이런엉터리해석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구절을 만들어내는 허구의 가설일뿐이다.


연개소문은 왕이아니었구,실전사령관이었다.적국과 싸울때 누구보다 먼저,앞장서서 나아가
싸웠을것이다.
연개소문은,평양성에서 지휘하다가,방효태군의 별동대가 온다는것을알구,
소정방에게 포위되어진 평양성을 빠져나가,평양성근처에서 방효태군을 기다리다가 싸워서 이겼다라는
이러한 논리는 전혀 엉터리가설일뿐이다.


좌효위대장군 방효태가 이끄는 군은 별동대가 아니라,핵심적 지원군으로,그병력규모는
기존에 평양성을 에워싼 당군사보다 더많았을것이며,군사의 수는 못해두 30만명은 넘었을것이다.


방효태가 이끄는 군사는 수군이아니라,육로로 행군해서 들어왔다.이미 평양성이 포위된상태에서
지원부대가 오구있다는걸 알았다면,연개소문이 위치는 원래부터,평양성에있지않았구,최전선에
위치해있었다구 보는것이 타당하다
.요동성이나 안시성등 지금의 동북3성근처의 사수라는 강
어디에서인가 퇴로를 끊구,연개소문이 기다리구있었다구 볼수있다.


이때 주목해봐야할 기록이 사수대첩이 일어난 당고조때가 아닌 당태종이 이전에 고구려를 침입하여,
도종이라는 사람하구 나눈대화의 요점이,어째서 자신이 고구려공략에 실패하였는가라구 물었을때
안시성에 집착하지말구,평양에 먼저 별동대를 보내서 혼란케해어야 하지않았나 대답하는기록이다.


연개소문은,최전선에서 싸웠을것이며,싸움에 승리는,오히려 당나라영역으로 꺼구로 진격하는
전술로 맞대응했다구볼수있다.당태종이,늪지를 급하게 도망갔던 이유도,후방이 연개소문에게
차단되었구,오히려 당의 영역에 연개소문이 진격하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연개소문이 평양성에 머물러 지휘했다면,어느세월에 평양성에서 연개소문이나와  당태종이 그렇게 겁을
먹구 살기급급하여  급히퇴각하구 도망갔는지 그해답이 나오지않는다.


사수대첩에서두,연개소문의 위치는 평양성이 아니라,최선에위치해서 싸웠을것이구
평양성에 밀구올라간게아니라,최선에서 오히려 당나라영역쪽으로 밀구올라갔다구 볼수가있다.


후방이 퇴로가 막혀있던,소정방군대뿐만이아니라,지원군으로  넘어왔던 모든 행군도총관들두,
요동지역에서 현장지휘를했던,연개소문에 의하여,다 궤멸되었다구볼수있다.


그러므로 사수대첩에서 죽은 당군의 숫자는 최소한 30만명이상이었으며,연개소문의 성격상
단1사람두 남김없이 죽였을것이다.전멸이 뜻하는것은,포로가 없다라는의미로 해석하는것이
타당하다.


어찌되었든,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의 지휘위치는 평양성이아니라,최전선이었으며,안시성전투,
사수대첩등 모든전투에서 연개소문이었을것이다. 안시성성주 양만춘이라는 인물두 허구일
가망성이 100%라구 생각한다.안시성이 포위되었을때 고구려에서 지원군을 10-20만을 보냈다는것은,
안시성을 구하기위하여 우리나라는 전력을 기울였다구 볼수있으며,그렇게한 가장중요한이유는,
그러한 병력을 동원할수있구 지원할수밖에 없는 중요한인물이 안시성에 포위되어 지휘하구
있었다구볼수있다.


즉,당태종의 눈까리를 맞춘화살이나,당태종이 늪을따라 목숨을 구걸하면서 도망가게한,당나라영토
깊숙히 추격할수있는 권한이나 배포를가진것은,그당시 상황하에서는 일개성주가 그렇게했을리는없구,
현장지휘자가 연개소문이었다면,가능한 이론이라구볼수있다.


안시성전투나,사수대첩 이모든 일련의 전투는 연개소문이 직접지휘했구,당태종이 눈까리에 화살을
맞구,안시성성주를 기특하게여겨,비단과 의복을 내렸다는데,그대상은 허구인 양만춘이아니라,
연개소문을 역적이라구 기술한 삼국사기의 잘못된평가기록때문이었다구 볼수있으며,역적에게는
공이 있었두,작게하거나,없게기술하는게 역적기술에 더합당하기에,누구인지는 모르는 안시성성주라는
두리뭉실한기록으로 넘어가버렸다구 볼수있다.


이런한 시대적기록이 조선후기에 양만춘이라는 가공의 인물로기록돼지만,조선시대는 고구려역사의
암흑기였기에,제대로된 개념을가지구 고구려역사를 논할수있는 사관이나 역사가는 애시당초 존재하지않구
멸종되었던시대였기에,조선시대에 기록된 고구려역사기록은 가장신뢰할수없는 기록이라구 볼수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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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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