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은 널리 알려져있지만,자세한내용은 전하지않는다.연개소문의 지략과용맹성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대첩이었는데도,여러가지 의문점을 남기는 기록을 보여주고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하여,사수대첩의 과정에 대하여 살펴보자.먼저 백제를 신라와연합하여 멸망시키는데 공을 세운 당나라 장군 소정방은 사수대첩이후로 죽음이 역사기록속에서 전혀 나타나지않고 있고,

살았다면  고구려 멸망당시에 70이넘은 이세적같은 늙은장수가 참가하는것을보았을때도 그러하고,또한 소정방이 고구려침략군에 직위만 바뀌고,항상 장수명단에 들어있었던 관례를보아도,


사수대첩이후에 행방이 묘연해지고,죽은기록조차 남아있지 않는걸보면 그의 죽음이 비참했음을 의미한다.사수대첩과 연관되어지는 또다른 당나라 장수가 당나라의 병부상서,오늘날에보면 국방부장관이라고 할수있는 임아상이라는 장수이다.이사람또한 사수대첩 기록이후로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되어있을뿐,어떤싸움에서 누구에게 죽음을 당했는지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방효태,임아상  3사람이 우연히 일치로,사수대첩이후로 역사속에서 사라져버린다.3사람에대한 기록을 찾아보고,사수대첩이 어떻게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는지 알아보고자한다.먼저,삼국사기에 나타난 연개소문,소정방,임아상,방효태의 기록들을 살펴보자


보장왕19년(660년)11월 패강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요동도행군대총관 소정방,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등으로 하여금,당나라는 여러갈래의 길을 따라 고구려를 침공하게했다.


 

보장왕20년(661년)4월 임아상 패강도행군대총관,계필하력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 평양도행군대총관등 35군을 수륙으로 나누어 고구려로 진군하게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8월 소정방이 대동강에서 고구려군사를 격파하고,평양성을 포위하였다.


 

보장왕20년(661년)9월 연개소문이 남생에게 군사를주어,압록강을 지키게하니,당나라의 군사가 넘어오지를 못했다.계필하력이 압록강에 도착했을때에는 강에 얼음이얼어있었고, 남생의 군사를 상대로 크게이겼으나,당나라에서 철수하라는 조서를 내려서,평양으로 진격하지않고 그냥 돌아갔다



 

보장왕21년(662년)1월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연개소문과 사수언덕에서 싸우다 군사가 전멸당했으며,함께참가했던 방효태의 아들 13명도 모조리 죽었다.이때 평양성을 포위하고있던 소정방의 군사는 폭설이 내려서,후퇴하여 돌아갔다.중국측기록에 662년 2월 전장에서 임아상이 죽었다라고 나온다



660년도의 당나라장수의 직책과 661년의 직책은 사라진 사람이보이구,기존직책을 살아남은 사람으로 재편되어 부여되고 있음을 알수가있다.평양도행군대총관 유백영은 11월에 고구려침략을 하는데,다음해 4월에는 소정방이 평양도행군대총관이 된것을보면,평양도행군대총관으로 11월에 고구려에 들어갔던 유백영은  전멸을 당했던지,대패를했기에, 5개월도 안되는 사이에 직책이 사라져버린다.이사람이 패전기록또한 기록되어있지않다.


소정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킬 당시를 보더라도,바다를 건너 군사를 이동하였다는것이다.661년에 평양도행군대총관에 임명되어,고구려를 침략하는루트는 육로를따라 요동을거쳐 평양으로 진군한것이 아니라,바다를건너
수군을 이끌고 곧바로 대동강을따라,평양으로 들어갔음을 알수가있다.


임아상의 패강도행군대총관또한 소정방과함께 대동강을따라,곧바로 평양으로 진격했음을 알수가있다.나머지  요동도행군대총관 계필하력은 ,압록강을 통하여,육로로 평양으로 진격하려고 했음은,연개소문이 계필하력군에 맞서기위하여,남생을 압록강수비로 보낸것을보면 알수가있다.


그렇다면,일반적인 고구려침공루트인 요동지역인 백암성,요동성,안시성등을 격파하고 내려온것이아니라,소정방,임아상,방효태,계필하력은,바다를 통하여,오늘날의 상륙전을 감행했음을 알수있고,대동강을 따라 평양으로 곧바로 진격했던 소정방과 임아상의 군대는 후방지원군의 식량의 도움없이는 완전히 고립되게됨을 의미한다.


그런데,고립된 소정방군과 임아상의 군대를 지원해줄 요동도행군을 이끄는 계필하력이 압록강에서 남생의 군대를 대파하고도,당나라의 철군조서를 받아서,돌아가버렸다라고 기록되는데,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을상태라,멀리 떨어진 신라에게조차 식량도움을 요청하는 상태였는데,고구려의 남생군을 대파했다는  계필하력군이 진격을하지않고,이기고 돌아가버렸다는것은,앞뒤가 맞지않다.


육로를 통하여 요동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올수있는 상태가 모두 막혀있었고,그나마 남아있는 압록강을 통한 당나라군의 진격또한,남생에의하여 저지되었다고 볼수있다.당나라군이 대승을한게아니라,남생군에게 대패를 했을 가망성이 많고,패배의 결과로 계필하력은 돌아갔을것이다.


그렇다면,왜 요동도행군총관인 계필하력은,소정방군을 지원하기위하여,곧바로 대동강으로 상륙한게아니라,압록강으로 움직였나하는 의문이생긴다.이것은 요동지역을 수비하고있던  고구려군사를,제압하면서 내려온게아니기에,계필하력군이 압록강에서 싸우지않았다면,평양성 깊숙이 들어간 소정방군은 요동지역의 고구려군사가 평양성을 응원하기위하여 남하 할수있기때문이라고 볼수있다.


그러나 계필하력군이 고구려의 남생에게 패하고 돌아가버리자,평양에서 고립되어진 소정방과 임아상군은 철수를 하지않으면,전멸당하게되는 상황에 빠졌다고 볼수있다.그렇기때문에,당나라에서는 이들을 구원하기위하여,긴급별동대인 20만명규모의 방효태군을 바다를 건너 배를 이용하여,직접 평양으로진격하여 들어가 도와주도록 했을것이다.


소정방군과 임아상군은 평양을 포위한상태라기보다는 꺼꾸로 고구려군에의하여 바다로 도망갈수도없는 퇴로가 완전히 차단된상태였다.이를 간파한 연개소문이,별동대인 방효태군이 배를타고 들어와서,사수언덕에 상륙하는 당나라군사를,전멸시켜버렸다고 볼수있다.1월에 연개소문의 사수대첩으로 긴급지원군인 방효태군이 전멸했고,2월에 임아상이 전장에서 죽었는데,임아상은 패강도행군총관이고,소정방은 평양도행군총관,계필하력은 요동도행군총관,그런데 이중에,계필하력은 압록강에서 남생에의하여,패전을했기때문에,계필하력은 고립되지않고 살아돌아갈수있었지만,소정방과 임아상은,이미 방효태군이 전멸당한 1월 이후에는,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임아상은 662년 2월에 전장에서 죽었다라고 중국기록에 나오는데,패강도행군은 1월에 방효태별동대 군이 전멸당하자,고립되어있던 패강도행군또한 전멸당했을것이다.한달기간안에,임아상이 다른 전장에서 죽었다고는 볼수없겠고,사수대첩과 연결되어 패강도행군이 전멸당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이치에 맞다.


그리고 662년 1월 연개소문의 사수대첩과관련하여 소정방이 폭설인 자연재해때문에 철수한게아니라,사수대첩과연계되어,평양도행군또한 전멸해버렸을것이다.소정방이 죽음이 기록되지않은것은,그 죽음이 비참했기때문이고,고구려를 침략했던,소정방,임아상,방효태등 행군총관들이 연개소문에 의하여 모두전멸되어 죽어버렸다는 치욕적인 기록을 남기는게 창피했기때문에,직접적인 별동대인 방효태군의 전멸은 기록해두고,나머지 임아상과 소정방은  어떻게,어디서 죽었는지 역사속에 감춰 버린것이라고 볼수있다.


사수대첩은 완벽하게 당나라군대를 한사람 남김없이 전멸시킨 우리나라역사에있어,유래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스케일이 큰규모인 대첩이었음을 알수가있다.연개소문의 성격이나 지휘스타일상,고립되어 차단된 당나라군대를 온전히 돌아가도록할만큼,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다.소정방이 역사속에서 사수대첩이후로 죽은기록이 사라져버린것은,사수대첩에서 그의군사들과함께 전멸해서 죽었거나,그에대한 책임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했을가능성이 많기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Posted by kungm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