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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재위51년(629년),8월에 고구려의 땅인 낭비성(오늘날의 청주시 인근)의 공격을 명령하고 김유신의 아버지 서현장군을 포함하는 5명의 군 수뇌부에게 5천의 군사를 통솔하게 하였다. 이때 유신의 계급은 중당당주(오늘날의 3개 중대인 300명 정도를 지휘하는 대대장)로 여단급 규모의 공격군을 편성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유신과 유신의 아버지 서현과의 관계는 장군과 대대장의 참전계급이었다.

신라의 오천의 군사가 낭비성을 공격하러 에워싸자 고구려는 역으로 성문을 열고,1만의 군사가 성 밖으로 나와 신라의 군사와 정면대결을 벌였다. 이에 신라군은 2천여 명이 죽는 대패를 당하고, 낭비성의 5리 밖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아군의 상태가 위급함을 느낀 유신은 스스로 서현장군 앞으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제가 평생 함께 아버님에 대한 효도를 다하길 기원했으나, 전쟁에 임하여 그러할 수 없음이 한이나 국가에 대한 충을 선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군사들이 무릇 전투에 임하여 용기와 사기가 있어야 하나, 우리의 군사가 패함은 이러함이 부족에 있습니다. 옷걸이에 옷을 걸면 옷이 모양이 바르게 되고, 그물코에 동아줄을 넣어야 제역할 을 할 수 있듯이 제가 옷걸이와 동아줄의 역할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며,

 

말위에서 칼을 뽑아 적진으로 홀로 쏜살같이 들어가서 막아서는 무수한 적군을 베면서 기어이 적장의 목을 베어 들고 돌아왔다. 홀로 분전하던 유신의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신라군은 분연히 일어나 적을 맹렬히 공격하여 5천의 수급을 베고,1천의 넘는 고구려군을 포로로 사로잡았으며,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던 낭비성의 남겨진 군민들은 죽기를 기원하고 달려드는 신라군의 모습에, 두려움을 느껴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훗날에 반굴과 관창의 예처럼, 부하를 사지로 보내 전세를 역전시키는 김유신장군의 전술행동은, 스스로가 선행했던 자세였음을 이해할 수가 있고, 적진이나, 위급한상황이든 항시 가장 절체절명의 순간에 최후의 사선의 맨 앞에 앞장서 나아간 이는 유신 그 자신이 솔선수범을 실천했음을 알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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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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