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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요동정벌에대하여 명나라에 대한 사대를 국시로 하여 탄생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명나라는 어떠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조선의 역할이 어떠했었냐하는 가에 대한 역사적 시각에 대한 글이다.

 

 

조선이 그토록 사대했던 명나라의 패망은 임진왜란을 통한 조선의 지원이 그 영향이라는 주객을 전도한 원인론도 주장되어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명나라의 국력은 중원대륙을 통일한 왕조들중 가장 약한 나라였고, 고려시대의 중국의 송나라와의 관계처럼 우리나라의 역할은 충분히 자주적이며, 강대한 위치를 보여줄 수 있었다.

명나라는 한족으로 하여 이루어진 정권이라는 자체가 이미 동북아 주변국들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상태의 국가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나라는 기본적으로 조선이라는 나라의 사대가 없었다면,270여 년간이 아니라 50년도 못가서 망해버릴 국제정세였음을 알 수가 있다.

명나라의 주원장이 태조 이성계가 보낸 조선의 사신들을 참수했을 때 요동을 정벌했다면 명의 존속기간은 훨씬 짧아졌을 것인데 4대불가론을 외치며 고려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킨 이성계의 입장에서는 소국이 대국을 치는 입장을 주장 할 수는 없었다.

명나라의 주변에는 원나라를 이어받은 북원이 명나라 멸망 때까지 강성하게 존재하고 있었고 이러한 몽골에 명나라는 가장 강성했다는 영락제때조차도 북원과 싸워서 대패를 당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며, 명나라 공주를 몽고의 부족에게 공물로 바치는 입장은 명의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명나라의 멸망과 몽골에서 칭기즈 칸의 칸의 칭호가 동시에 사라지는데, 이것은 명나라의 탄생과 북원의 탄생과 멸망은 같은 운명을 가졌다는 것이고, 명나라 집권시기내내 명나라는 몽골의 위협에서 안정적이었던 때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있어 문화적으로, 국력으로 최전성기라는 세종대왕이라는 시기가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명나라와 몽골의 전쟁 상황과 일치한다. 명나라의 주원장의 생각은 애당초 조선이라는 나라를 가만히 나두려는 생각이 없었고, 북원이라는 몽골이 존재만 평정된다면 조선을 침략하여 멸망케 할 생각이었다. 이것을 실행하지 못한 것은 북원의 몽골은 명나라의 멸망 시까지 끝까지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사에 있어 조선의 역사를 기술할 때 크게 왜곡하는 부분이 국제정세를 활용하거나 이용할 줄 모르는 집권왕조에대한 비판보다는 침략을 받은 상황 하에서의 침략한 국가에게 그 책임을 모두 덮어씌우는 기술을 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온 것이 임진왜란에 조선을 도와줬기에 명나라의 국력이 낭비되어서 여진족이 흥기할 수 있었고 결과적으로 멸망에 이르게 된 한 원인이라고 버젓이 중국에서조차 인정하지 않는 원인을 우리나라는 그럴듯하게 역사인식인냥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기술의 원인은 임진왜란의 주체가 일본이라는 것에도 영향이 있는데,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바라본 국제정세는 일본이 명나라를 치던, 그렇지 않던 명나라가 멸망할 시기라는 관점은 정확했고, 그것을 바라보지 못했던 나라는 오직 조선뿐이었다.

몽골의 북원이나 여진은 동북아세력중 고구려인 한민족만이 명나라에 대한 국제정세를 거꾸로 해석하고 밀고나간 청개구리 국제정세관을 가졌었다는 점이다.

명나라의 최전성기 황제인 영락제를 보더라도 그가 몽골의 북원을 치기위하여 모집한 군사의 최대 수는 50만 대군이었고 이러한 원정군을 동원했더라도 몽골을 명나라의 지배 상태로 둘 수 없었고 겨우 호각지세를 이룰 정도 였는데, 이 이후의 명나라 황제들은 일방적으로 얻어터지는 상황에 명나라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문화적으로 국력 적으로 부흥기를 맞이한 세종대왕시기를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이 명나라에 사대를 하여 명나라가 시비를 걸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종대왕시기에 명나라 황제인 영종이 이끄는 몽골에 대한 원정군 50만이 몽골의 2만기병에 전부 몰살되고 명나라가 황제 포로가 되는 토목의 변이 나타난 시기였다는 점이다.

몽골의 군사령관인 에센태사의 용병술이 뛰어난 점도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북원의 몽골에 대하여 군사력의 싸움으로는 명나라가 몽골을 제압할 수 없었음을 의미하고, 이러한 관계는 명나라 멸망 시까지 이어졌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전 명나라의 상태는 이미 명목상의 명나라가 존재할 뿐 민심이반이 심각하여 언제 망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태 하에 놓여 있었다.

몽골이 중원을 재집권하던, 여진족이 중원을 정복하든, 고구려인 한민족인 조선이 정벌을 실행하든 누가 먼저 명나라를 치느냐에 따라 명나라를 멸망시키는 민족이 될수 있었다. 그러나 오직 조선만이 국제정세에는 눈감고 오로지 이씨왕조집단의 안위와 부귀영화만을 우선으로 쇄국의 국제정세만을 주장하고 이어갔다.

북원의 몽골과 명나라의 멸망의 시기가 일치하는 점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청나라의 태종인 홍타시인 황태극이다. 우리나라의 인조에게 삼전도의 치욕을 안겨준 인물인 청태종이 북원이라는 몽골의 칸이라는 지위를 마지막으로 받아 북원의 몽골은 사라지게 되는데 몽골에서 여러 부족이 있다해도 칭기즈 칸의 직계가 칸이라는 직위를 받을 수가 없는데 이민족인 여진족인 청태종이 칸이라는 직위를 받아 몽골이 항복한 이유는 청나라는 몽골과 여진이 연합정권으로 출발했기 때문이었다.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끈 3대황제인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의 혈통은 여진과 몽골의 결합으로 칭키스칸계의 성씨를 쓰는 몽골여인들이 황제들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청나라도 초기에 붕괴되었을 것이고, 오래세월 중원지배세력이 될 수도 없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으로 원나라 황실의 공주가 고려의 왕의 부인으로 정례적으로 혼인을 했듯이 몽골의 공주가 여진인 청나라의 황제의 부인으로 맺어진 것은 같은 역할로 존재하는 것인데 조선이라는 나라는 고구려를 이루어 하나의 나라를 이룩했던 여진인과 몽골인과의 오래도록 이어져 내려온 연을 안면몰수하고 모른 척 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명나라와 호응하며 이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몰염치함을 보여주었다.

명나라를 이룩한 주원장의 시각으로는 처음부터 북원을 정복했다면,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조선이라는 나라도 정복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명나라의 멸망 시까지 북원의 몽골이 정복되지 않았기에 조선을 침략하지 못했다.

고구려를 이루어 한 나라였던 몽골은 명나라의 50만 대군을 이겼던 민족이었고, 여진족 또한 그와 상응한 수의 명군을 격파한 민족이었는데 고구려를 이루었던 민족 중에 한민족이 제일 갑으로 중국의 정규 113만대군, 지원참모부대를 포함하면 300만 대군과 싸워이겼는데 이러한 전승은 중국역사에있어 이전이나 이후로 300만 대군을 이긴 민족은 고구려인 한민족이 유일하다.

고구려의 지존이며 주체는 한민족이었고, 그와 연합했던 여진,거란,몽골,선비족등은 그 기상을 높이 하여 싸워나갔는데 그중에서 명나라시기에 조선이라는 한민족처럼 국제정세를 꺼구로 가는 민족혼을 보여준 여타 민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북원이 존재했던 17세기 중반까지, 그렇지 않다면 여진족이 몽골과 연합하여 부마국의 지위로 청을 건설하여 명나라와 싸울 때, 그때까지라도 단 한번이라도 주위의 세력들과 연합하는 국제정세를 활용하거나 이용할 수 있는 지혜를 발휘했다면 현재의 대한민국의 영역보다 더 큰 고토를 회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술할 때 특히 조선사를 기술할 때 외국의 침략에 대하여 외국 탓만을하며,왜 얻어터질 수밖에, 왜 복장이 터질 수밖에 국제정세에 눈감고 국가를 이끌어간 집권세력에대한 비판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일제에 의한 지배를 당한 역사의 서술에 있어서도 분명하게 전제되어야 할 것이, 국제정세에있어 쇄국만을 고집하고, 끝까지 이씨왕조의 부귀영화를 위하여 백성들을 외국군을 끌어들여 학살하고, 결국에는 망국의 상황에서도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린 집권세력에대한 비판과 처단에는 눈감고 오로지 일본의 침략탓이다라는 짓거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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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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