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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등의 정사에 나오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왜곡된 부분들이 있는데 왜이러한 잘못된 전쟁사를 정사에 기록하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먼저 고려 목종에 관련된 기록에있어 목종은 효자인것은 분명하나 그의 모후 천추태후의 신분은 고려건국 태조인 왕건의 손녀라는 것인데 여기서 천추태후의 집안은 고려의 호족정치에있어 태조왕건이 왕권을 강화하게해주는 근본토대를 만든 집안이라는 것이다.

고려의 4대 광종까지 왕건의 아들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5대부터 왕건의 손자들이 왕위에 오르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역사적으로 희귀한 사례가 발생하는데 5대  경종의 아내들로 천추태후의 자매가 연이어 왕비에 오르게된다.

천추태후는 경종의 장남인 목종을 낳았고 여동생인 헌정황후는 경종의 사후 왕씨 종친과 불륜으로 사통하여 훗날 대량원군 왕손으로 불리는 현종을 낳았는데 5대 경종이 죽으면 당연히 천추태후의 장남이 왕위를 이어야하지만 어리다는 이유로 천추태후와 헌정황후의 친오빠가 6대 성종으로 등극하게 된다.

그러므로 고려초기 왕씨의 왕권강화에 있어 천추태후와 헌정황후 그리고 성종은 같은 형제자매로 고려 왕족이 500년을 집권하게하는 궁극의 토대인 집안을 만들었다고 할수가 있다.

한국 왕조역사에 이러한 자매의 아들들이 차례로 연이어 왕위로 올라간 사례가 없고 고려의 목종과 현종이 유일한 사례였기에 희귀한 왕위계승이었다고 할수가 있었다.

고려사등 정사의 기록에등으로 오늘날에는 고려의 7대인 목종에 이어 등극한  8대인 현종을 세종대왕에 비교하는데 현종이 군주로써 명군인 것은 사실이었으나 거란과의 전쟁사에있어서는 왜곡되어 기록되어지는 구절들이 있음을 살펴볼수가 있다.

천추태후는 자신의 여동생이 낳은 아들인 현종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인데, 천추태후 입장에서는 여동생이 낳은 현종은 경종의 아내였던 자신과 자신의 여동생의 정통성에 있어 자신의 아들인 목종이 후사가 없다면 오히려 불륜으로 낳은 여동생의 아들인 현종보다 자신도  김치양과의 사이에 불륜으로 낳았지만 자신의 아들이 오히려 목종이 후사로 맞다고 생각한게 틀렸다고 볼수가 없었다.

왕조시대에 선대왕의 아내였던 왕비들이 불륜으로 천추태후와 헌정황후 자매가 둘다 아들을 낳았는데 헌정황후는 같은 왕씨와 불륜을 해서 낳았다는 것이고 천추태후는 김씨와 불륜을 해서 낳았다는 성씨 차이일뿐 서열상으로 천추태후가 당대 목종의 어머니이고 여동생보다는 그 위치가 높았기에 자신의 아들인 목종의 후사가 없다면 불륜일지라도 자신이 낳은 또다른 아들을 올리려고 했던 것은 통일신라대 여왕의 전통인 모계가 강하게 이어진 고려초기에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신라가 여왕이 등극하고 후대에 왕위가 이어진다면 여왕의 남편이 조씨이든 윤씨이든 김씨왕조로 여겨져 이어졌는데 신라와 마찬가지로 고려초기인 모계영향력이 강했던 시기에 천추태후의 생각은 오늘날에서  이해가 안될지 모르지만 이상할것도 없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 와서 강조가 왜 목종은 죽이고 그의 모후인 천추태후는 죽이지 않고 목종사후 21년을 친정인 황보씨가에서  장수하다 편하게 자연사하게 나두었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있는데  

천추태후는 왕건의 친손녀이고 고려의 왕씨의 토대인 강건한 호족의 군사력을 보유한 집안의 장녀로 친할아버지가 태조왕건, 친오빠가 성종이었고 ,당대 목종의 어머니였고, 후대 현종의 큰이모였는데 왕씨 왕족을 절멸하여 역성혁명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이여자를 죽여서는 고려가 유지될수가 없는 어마어마한 왕씨왕족을 대표하는 기둥이기에 누가 그것을 뽑을수 있는가 말이다.

어째든 배경은 이러한 시대였는데 현종대에 거란과의 전쟁이 발생하게되는 여기서 서희의 강동6주니 강감찬의 귀주대첩등이 고려사의 정사기록등에 나오게 되는데 문제는 그러한 기록들을 읽다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것들이 있기에 이부분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의문점으로 들어가보면 귀주대첩에 있어 승리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로 기록된 병마판관이 이끌고 거란의 후방을 공격한 고려의 기병 1만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다. 

도대체 이해가 할수없는게 고려라면 대장군,장군도 아니고 조선이라면 관찰사 도절제사가아닌 판관이라는 오늘날의 공무원 급수로보면 4급에 해당하는 판관벼슬이 오늘날의 군대로보면 대위나 소령쯤에 해당하는 중대장벼슬을 가진 사람이 고려의 기병 1만명을 이끄는 총사령관이었다는데 이게 말이 안된다.

오늘날의 군대의 직제를 보더라도 1만명의 직속군을 지휘하려는 최소한 별을단 장성급이지 중대장급이 그러한 부대를 이끌고 거란의 후방을 쳤다는게 개소리라는 것이다. 더욱더 믿을수 없는 부분이 우리나라가 제주도에 말의 방목장을 두어 대량의 말을 기를수 있었던 시기가 몽골의 원나라시기이기에 그보다 한참 앞선 거란과의 전투시에 1만의 넘는 말을 구하기 힘들었을뿐아니라 그렇게 귀한 말을 타고 이끄는 부대의 지휘관을 대장군도 아니고 현종이 판관벼슬에게 맡겨서 출전시킨게 맞는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역사적 기술이 문제점을 풀려면 거란의 침입루트나 후에 병자호란,임진왜란등의 전투에서 실마리를 얻을수가 있다. 먼저 왜 북방이민족들의 공격루트는 항상 예외없이 압록강지경만으로 한반도로 진입했느냐이다.

우리나라는 압록강이 아니라 백두산의 두만강지경도 있는데 왜 왜 왜 두만강 지경으로는 한반도의 진입공격루트로 거란은 한번도 시도조차 해보지 않았는가 하는점이다.

여기에 고려사의 정사에 기록된 귀주대첩의 왜곡된 거란과의 전쟁사를 풀열쇠가 들어있다는 점이다. 귀주대첩이 한반도를 지킨 결사의 전투이고 한민족의 자랑인 역사적 대첩은 분명하다. 다만 이과정에 있어 승리의 결정적 요인중 하나로 지목된 고려기병 1만의 정체이다.

소배압의 10만 거란군은 조선의 병자호란시 청나라의 신속기병군으로 삼전도의 치욕을 만들었던  방식의 당대최강의 기병으로 이루어진 전부가 기병대였다는 것이다.

한민족의 전투사는 공성전에 특화되어 물리치는 전투민족이지 드넓은 평야에서 대규모 전투에서 이기는 고대전쟁사는 단한번도 존재하지 않았고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유일하다. 유일하다면 뭔가 기존과는 전혀다른 것이 작동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거란기병대의 후방을 때렸다는 고려 기병의 존재였다.

실제 역사속에 있었던 그 기병대의 비밀을 풀어보면 거란과 고려의 귀주대첩시 거란의 후방을 공격한 기병대의 정체는 고구려왕조를 함께 이루었던 숙신또는 말갈로 불리던 백두산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했던  쫄따구 벼슬인 병마판관이 아닌 흑수말갈족 기병이었다는 것이다.

강감찬장군의 이끌었던 보병 20만이 거란의 소배압의 10만 기병대에 넓은 평야에서 그대로 전투가 지속되었다면 우리나라가 수적으로 2배인 전력이고 말의 진로를 방해하는 검차같은 다양한 장비가 준비되어서 그랬다는 잠꼬대같은 소리해봐야 고려의 군대는 거란 기병대에 전멸을 했을것이다.

전멸하지 못하게 거란의 기병의 후방을 친 기병대의 정체는 어디서 왔는가하면 그당시 흑수말갈의 기병인 5만의 병력이 거란의 후방을 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흑수말갈 오늘날에는 여진족이라고 불리는 세력이 고려와 호흥하여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쳤나는 것이다.

태조왕건의 반거란 정책을 시행한 중요한 요인중 하나가 거란이 고구려의 계승자인 형제국인 발해를 무도하게 멸망시켰다는 것이었는데 이때 발해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우리 한민족과 말갈에 해당하는 여진족이 민족구성으로 이루어진 국가라는 점이다.

거란과의 전쟁시 고려의 적이 거란이었지만 말갈족의 입장에서도 자신들의 나라를 멸한 원수이기에 공통적인 적으로 대적하는데 이상할것이 전혀없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당시에도 조선의 선조가 의주에서 조금만 더 잡으러 오면 중국으로 도망갈거같아 왜군이 더이상 진군하지 않았다고 엉터리 논리를 펴는 분들도 있는데 사실은 

그때당시 말갈족인 여진족이 차지한 백두산주변지역은 중원을 삼킨 청나라를 세울 부족들이 막강한 기병군사력을 실제로 보유하고 있었고 이때 일시적으로 동원가능한 말갈의 기병을 5만으로 임진왜란시 기록에 남아있는데 이들이 참전할수도 있는 상황이 될수도 있었는데 왜군은 이들과의 확전은 막대한 피해만 예상되어 더이상의 전진이 없이 후퇴하고 정유재란시에도 여진족인 만주족이 기병대가 있는 지역으로는 아예 더 북진할 생각을 하지 않게하는 요인이 되었다.

거란과의 평야에서 전투인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후방을 격파한 기병대는 흑수말갈기병으로 이들이 역사기록에 지휘관급으로 기록되어진 성씨중에는 특이하게도 고씨인 성씨들이 많은데 이들의 정체성은 두가지부류로 자신들을 고구려의 국적으로 생각하는 말갈족과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순수 말갈족으로 구분이 되었는데 고씨들은 아마도 고구려후손들로 생각하는 말갈족계통으로 생각할수가 있는대 발해를 세운 대씨들도 비슷한 성씨들이라 할수가 있다.

거란이후 금나라가 강성해지는데 바로 이들이 고려초기 거란과의 전쟁에서 고려의 막강한 기병대를 가지게하는 후원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말갈족이 우리나라와 연합하여 중원세력과 싸운 기록은 고구려와 당태종 이세민의 전투사에도 이들이 고구려와 연합하여 당군을 공격하여 당태종이 고구려와의 전투시 포로로 잡힌 수만명의 말갈족을 생매장하거나 다죽였다라는 기록이 정사에 남아있을 정도이기에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한 고려나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주장했던 발해나 말갈족은 우리나라와 외적들의 전투시에 함께싸우는 주요부족이었음 알수가 있다.

뼈아픈점은 이러한 말갈족인 만주족이 역사적으로 우리나라가 상국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상하우위가 바뀌어 청나라가되어 우리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게하는 삼전도의 치욕을 만들게했기에 영원한 동지도 적도 없다는 국제사회의 논리를 잘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고려와 거란의 귀주대첩당시 거란을 전멸의 상황을 만들수있는 대적가능한 동아시아에서 유일한 강한 기병은 판관나부랭 중대장급이 이끈것이 아니라 그당시 유일한 가능성은

백두산지역에 부족을 이루어 생활하던 말갈족인 5만 정도의 기병이 그당시 즉각적으로 응대가 가능한 병력이었다는 것이다. 거란를 멸망시키는것도 백두산지역의 말갈족인 금나라였던 것만 보아도 그당시 고대사 우리나라와 북방세력이 전투시 단골처럼 함께했던 말갈족이 귀주대첩에서는 아무런 기술이 없다는것은 누가봐도 이상한 점이고, 

고려의 태조왕건이 후백제와의 통일을 위한 일리천에서 벌어진 최대의 전투에서도 최대한 끌어모은 병력이 정사에서 8만정도라고 기술한 경우도 있는데 실제로는 최대한 끌어모은 추정치가  3만정도였는데 그중에 고려왕건이 후백제를 쳐부술때 흑수말갈의 기병대 참가병력을 1만명정도로 기록하고 있는데 

내전에도 고려초기 흑수말갈이 기병을 1만을 지원해줄 정도면 국제전이 발생했을때 백두산지역에 비산해서 살아가던 흑수말갈부족의 기병대가 얼마나 더 지원이 가능한 상태였는지는 미루어 충분히 짐작할수가 있고 고려가 부족한 실제로 강한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정하는것이 틀리지 않다.

좀더 정확하게 살펴보면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에서 거란의 10만기병대를 후방에서 기습할수있고 맞설수있는 그당시 유일한 기병대는 백두산지역의 흑수말갈이 보유한 기병대이고 이들이 고씨성을 가진 예가라는 지휘관에의하여 참가하여 고려군과함께 거란기병대를 후방을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이렇게 역사의 미스테리를 풀어나가는것이 엉터리 정사기록보다 더 맞고 왜 이부분을 역사에서는 흑수말갈의 지원을 숨기고 밥풀때기 3개를 단 중대장급인 병마판관이 1만의 기병을 지휘하여 쳤다는 황당무계한 기록을 남겨나는 것이고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이 고대나 현대의 군대계급체나 지휘체계만보더라도 뭔가 이상하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다는것도 더 희귀하다 할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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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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