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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660년 6월21일 소정방이 이끄는 10만명의 당군이 인천의 덕적도라는곳에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다.

소정방과 신라의 협력을 위하여,신라에서는 태종의 둘째아들인 김인문을 소정방과 동행하게하여 군사를 이끌게하고,

태종의 첫째아들인 김법민은 김유신장군과 함께 군사를 이끈다.김법민은 훗날 왜적으로 침입으로부터 동해의 용이되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문무왕이 된다.

신라에게 있어 왕자들의 배치를보면 당나라의 군사보다는 김유신장군이 이끄는 군사에 더 중요성을 두었음을 알수가 있다.두나라가 작전회의를하여,660년 7월10일날에 신라군과 당나라군이 백마강입구에서 모여 함께 사비성을 공략하는것으로 했는데,여기서부터가 백제의 계백 오천명의 미스테리가 시작되어진다.

먼저 백제측에서보면 당나라군사의 침략이 갑자기 이루어져 사비성을 친게아니라,20여일이 터울을 두고,신라의 영역이던 인천지역을 당도한후,대강의 작전계획을 신라와 짜고,배의 방향을 바꿔,백마강하구로 진격해드러 갔다면 이에대한 대비를 백제에서도 할수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음을 알수가있다.

백제의 충신들이 당나라의 침공이 있기 4년전에 "전투가 벌어지면 당나라군은 백강을 넘지않게 하시고,신라군은 탄현을 넘지말게하소서"라고 계책을 올리는것을 보면,백제는 국제정세를 잘파악하고 있었고,고구려와 연합하여,신라를 공격했을때 어떠한 국제정세가 벌어질것인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음 알수있고,



당나라 수군이 직접 백강입구로 들이 닥친것이 아닌 인천에서 대규로 집결한후,다시 백강입구로 쳐들어왔는데,이에대한 대비를 할수있는 여건은 충분히 마련할수있는 상황이었다.그러나 백제가 보여준 전투다운 전투는 황산벌에서 벌어진 오천명의 군사들이 방어가,제대로 싸워본 처음이자 마지막기록이 되어진다.

여기서 드는 두번째 의문은 백제의 군사력이 신라를 압도했고,역사서에 패망당시 80여만호에 인구가 600만명이 넘었다고 하였는데,농번일치의 제도로 외적의 침입하면 남자는 모두 군인이 되는 제도로 보았을때,600만명의 절반이 남자라면 300만명,여기에 노인이나 어린이를 빼고,정상적인 젊은이를 최소한 10%잡아도 위급시에는 최대 30만명의 군사력을 동원할수있는 국력을 가졌다고 추측해 해볼수가 있다.

고려 광종때,거란의 침입에 대비하여 30만명의 광군사를 조직 할수있는 인적환경을 보았을때,고구려이든,백제이든,신라이든 아무리 어려울때에도 결전을 할수있는 15만정도의 군사는 마련 할수있는 국력이 삼국에는 있었음을 알수가 있다.

이러한 군사력이 추정이 가능함에도 신라군 자체로만 5만명을 동원하는 황산벌싸움에서 계백은 단지 오천명만을 가지고 출전할수밖에 없던 이유가 있을수 밖에없다.신라군은 인천의 덕적도에서 당나라군과 만났을때 작전회의를 통하여 당나라군의 배에는 신라의 두번째 왕자가 길을 안내하고 있었는데

백제의 지리를 선도할 신라군이 일정정도 함께 승선하여 백마강입구로 나아갔음을 충분히 예상할수있다.그러므로 신라의 원정군 규모는 김유신이 이끄는 5만명이외도,식량이든 군수품이든 당나라군사와 함께하여 지원할 공병.식량부대격인 신라인들이 동해하여 지원하고있었을 것인데,이러한 군사도 대략 2만은 넘었을것으로 볼수있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거나,당나라군의 변심에의한 공격을 방어하기위한 대비로 ,신라는 일정정도의 예비군사력을 신라지역내에 자체 보유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면,신라가 백제와의 일전에 대비하여 최소한 10만명 이상의 신라군을 움직일수있음을 알수있고,얼추 예상 삼국의 국력과 맞아 떨어진다.



백제의 군사들은 다들 어디에 가있었느냐라는 의문이 들수밖에 없는데,이것의 진실은 계백의 계급이 낮은것에 주목해야한다.오늘날에보면 병마원수라든지,수륙양용원수라든지 삼군통제사라든지,왕이 내릴수있는 직위는 여러가지가 있었을것인데,달랑 계백장군일뿐이다.달랑이나 달솔이나 발음이 비슷한것을보면,정말 달랑 그것밖에라는 의문이 들수밖에 없는 달솔의 계급을 가진 장군일뿐이었다.

이것은 훗날 백제가 멸망한후 신라에서 논공행상이 행하여졌는데 계백의 군사와 출전했던 달솔보다 위에 계급인 좌평 충상,달솔 상영등을 태종무열왕이 이들에게 일길찬이라는 높은관직을주며 후대하였다는 기록을 봤을때,아래것인 계백은 전사하고,그보다 위에 계급으로 참전하여 포로로 잡혔던 충상,상영이 신라의 높은 관직을 하사받는것을보면 백제가 신라군을 맞아 싸운 황산벌의 백제군 규모는 오천명이 아닐수있고,오천명을 제외한 군사는 싸우지않고 항복했거나,그렇게 되겠끔 충상,상영이 협조했기에,그에대한 공으로 신라의 태종이 관직을 제수했음을 유추해 볼수가 있다.

계백의 이끈 오천명은 별동대고,그와 함께 출전한 본진은 최소 3만이상의 백제군이 뒤에 대기 하였다라고 할수가있다.삼국사기의 기록은 삼국의 초기국가부분의 신뢰는 미약하나,그이후에 기록되어진 역사기록의 정확도는 아주높은데,계백이 오천명의 결사대로 싸웠다라는 기록이 사실에 부합하다라는것을 부정할수없고,그렇다면 이해될수없는 백제의 국력에 비해 터무니없는 황산에서의 군사수는 충상.상영의 논공행상에서의 부귀영화에서 답을 찾을수 있을것같다.

이러한 결과가 아니라면,어디에선가 역사에 기록 되어지지 않은 백제군이 대규모의 피해를 입은 전투가 있었다는 것인데,이러한것이 있었다면 삼국사기에는 없다해도 중국측 역사서나,일본역사서등에는 있어야할것인데 전혀없는것을 봤을때,계백은 싸움에 있어 선봉대역할을 했던 특공선발대를 이끌었던 장수의 하나였을 뿐임을 알수가 있다.

특공대가 무너지자,백제군의 본진은 우두머리들과 함께 그대로 항복해버린 상황으로 보는게 자연스럽고 다른방향인 당나라군사를 대비한 백제군의 본진도 보전되어 그쪽에서도 황산벌싸움과 비교되어지는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역사의 단편적 기록들로 미루어 짐작할수가 있다.신라군이 합류할 약속시간까지 미리맞춰 백강하구에서 상륙작전을 진행하던 당나라군이 신라군이 올 동안 전진하지않고 있다가,김유신장군의 신라군이 늦게라도 합류하여 앞으로 나아가자하는데도 소정방군이 머뭇거렸다는 기록을보면 소정방은 단독적인 백강하구상륙전에서 대대적인 백제의 공격을 받았고,그영향으로 더이상의 전진을 하지않고 약속시간이 지났는데 도 신라군을 기다렸다고 볼수있고,

이후에 신라와 당나라군이 합세하여 사비성의 8킬로 지점에 이르렀을때 다시 대대적인 백제군사의 반격이 있었는데 중국측 역사서에는 이때 일만명정도의 백제군이 죽었다라고 했음을 볼때,포로를 감안하면 2-3만명의 백제군이 공격했음을 알수가 있다.

660년 7월10일날에 백강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던 김유신의 신라군이 예상기일인 660년 7월11일 늦은오후에 백강입구에 당도했을때,소정방이 김유신장군의 부하에게 늦게 당도한 책임을 물어 참수하려고 하자, 도끼자루를 손에들고 소정방등의 당나라장군들을 바라보며 황산에서 무슨일이 있었는지 알지도 못하는것들이 늦은책임을 물으려하다니,당나라군사를 먼저 없애버리고,백제를 치겠다라는 기록이 남겨있음을 봤을때,

김유신의 사내다움은 삼국의 제일이요,대국의 군사에도 전혀 주눅들지 않았음을 알수가 있고.이러한 모습은 한번 어쩌다가 아니라,김유신장군 자체가 지나온 전사에있어 기록이 말해주고있는데,

김유신이 아버지와 함께출전하여,고구려와 싸울때 신라군이 고구려군을 두려워하여 사기가 떨어지자,아버지에게 말하고,혼자 적진으로 들어가 상대방 장군의 목을 베어서 돌아와서 그기세를 몰아쳐서 이겼다는기록이나,황산싸움에서 김유신의 친동생 아들인 반굴 그리고 사촌의 아들 관창등이 홀로 적진에 드러가 싸우다 전사했다는것등을 보면,

김유신장군이 살아온 무인의 길이,자신과 자신의 집안사람이 먼저 솔선수범하여 생명을걸고 전투에 임하는것을 기본으로 했음을 알수가 있다.뒤에 앉아서,돌격하라의 장군스타일이 아니라,나를 따르라하며 앞으로 먼저 나아가 싸우는 장군 스타일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반굴과 관창이 희생양이라고 하는데,어찌보면 맞지만,김유신이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홀로 적진에 들어가 적장의 목을베고 돌아와서 승기를 잡았듯이 반굴과 관창이 계백의 목을 치고 가지고 돌아왔다면 반드시 죽어야할 운명은 아니었다.단지 반굴과 관창은 그러할정도의 운명의 그릇을 가지고있지 못했음이다.

계백이 신라대장군 김유신을 두려워한 이유도,김유신장군이라는 사람됨이 자신을 따르는 부하의 목숨을 자신의 아들과 친척들보다 못하다 생각치않고,오히려 힘든상황일수록 먼저 자신들의 가족들이 솔선수범을 보이도록 행동했다는 점이다.김유신 장군의 참모들에게 유독 김씨가 많은데,이러한 인물들이 공통점은 가장 어려울때 가장먼저 선봉의 죽음을 맞이해야함을 김유신의 삶의 행적을보면 이미 각오하고 참전함을 알수가 있다.

계백은 마지막 순간에 전사하면서도 이러한것을 생각한다.왜 자신은 죽고,김유신이 승전의 장군이 될수밖에 없는지,왜 자신은 달랑 오천의 군사만을 가지고 싸워야했는지, 백제가 김춘추와 김유신의 분노를 만들어내게된 원천적 책임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등을 말이다.

김유신과 김춘추의 백제 정벌전이 벌어지기 이전에 자신의 장녀가 대야성에서 백제군의 윤충에게(이사람의 집안은 백제에게 병주고 약주는 집안이 되는데,위에 형님인 성충은 백제의 3충신이 하나가되고,이사람의 동생인 윤충은 신라의 김춘추와 김유신장군의 불구대천의 원수의 감정을 갇게 만들어 내어 백제패망의 근원적 감정을 만들어낸 장본인인데,특이하게도 이들은 실무진급 장군들이아니라,부여씨를 성으로하는 왕족 집안출신이라는 점이다.실무자급 장군이었다면 김춘추의 장녀의 머리를 베어 사비성으로 보내는 이러한 원한의 감정을 갖게할 짓을 독단적으로 처리할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든다.)목베여 죽여졌다는 소리를 듣은이후로 미친사람처럼,자신의 장녀를 그리워했으며,그 분노로인하여 술이 밥이었다고 전해지고있다.

김유신은 자신의 동생의 딸이 목베여져서 그머리가 사비성으로 보내졌다는것을 알고,한 하늘을 이고 같이 존재할수없는 나라라고 규정하여,분노에찬 정벌을 계획하게 되는데,목베여진 머리가 사비성으로 보내진후 6년이 넘어가도록,유해를 돌려받기위해 노력하다가,김유신 자신이 포획한 백제우두머리급 장수들 8인과 맞교환하는 방식으로 신라로 유해를 돌려 받았을만큼,김유신에게 있어,목베어진 동생의 딸에대한 복수의 칼날을 가는 시간이 일반인의 예상을 벗어날 정도의 기다림이었다는 점이다.대야성에서 목베어진 여자에대하여,나중에 문무왕이되는 김법민이 항복한 백제태자에게 분노하여하는 말이나,김유신의 혼신을 다하여 유해를 돌려받으려고 했던 기록등을보면,이복누이라기보다는 친누이로 판단하는것이 자연스럽다.

어찌되었든 그당시 김유신을 건들이고는 나라의 멸망을 각오해야할 만큼,절대적인 부하들의 믿음과 신뢰를 김유신장군이 갖고있었음을 알수있고,고구려의 연개소문조차도 김춘추를 죽이려했지만,그후에 닥칠 김유신장군과의 일전을 두려워하여 살려보내줬음을 김춘추와 김유신의 약속의 기록을 보지않더라도,실제로 연개소문이 김춘추를 죽였다면,백제가 먼저 멸망하는것이아니라,고구려가 먼저 대상이 되었을것을 김유신의 행적상 능히짐작할수있다.

오늘날 역사인물들에대한 평가에서 우리나라의 오천년역사의 제일의 장군을 뽑으라면 연개소문,계백,이순신등이 많이있지만,제일은 신라의 김유신대장군이다.천오백년이 지난 오늘날에 그 많던 왕이나 영웅호걸들의 무덤은 어디에있는지 전해지지 않는것이 다수이지만,김유신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나라의 흥망성쇠로 국가명들이 여러 바뀌었지만,그의 무덤은 어느나라 시절이던간에 잘보전하여,후세에 전할 위대한 장군이라는 개념으로 관리되어 계속이어져 왔다는점이다.

오늘날의 한민족의 뿌리가 어디서왔는지 아는분들이 드문것같다.오늘날의 한민족이라는 민족개념을 만들어낸것은 김유신대장군이후에 생긴것이고,김유신장군이 없었다면 한민족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을것임을 알아야한다.대한민국인이면서 대한민국의 한이라는 개념이 어디에서 나온것인지 모른다면 부끄러운것이다. 한민족의 개념을 말하고,일통삼한이 한민족이 되어야함을 유언을 할정였고,그것이 죽어서도 소원이라고했던 김유신대장군의 애국혼을 모르고는 한민족을 말할 자격이 없다.한민족을 만들어낸 오천년 역사의 제일의 장군인것이다.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되던날 삼천궁녀가 낙화암에서 강물로 뛰어 내렸다고 하는것에 패망의 군주를 험담하기위해서 숫자를 부풀렸다고 하는데 이러한것도 그당시 백제라는 나라의 풍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에서 비록된다.삼국시대에는 순장이라는 풍습이 존재했는데 왕과 관련되어진 여자들은 왕이사후,같이 자결하거나 무덤에 뭍히는 전통이 있었는데,백제의 패망의 순간은 다시는 돌아올수없는 국가의 상태를 의미했고,의자왕의 기록되어진 아들들만도 40여명이 넘었음을 알수가있는데 그만큼의 아들이 태어날려면,비율상 여자들도 그만큼 태어났다고 가정하면 의자왕은 보통으로 잡아도 100여명의 아들딸을 슬하에 두었음을 알수가 있고,

궁녀라는 신분이 잠자리를 같이하는 궁녀만이아니라,밥을 짓는 궁녀,옷을 담당하는 궁녀등등 여러부류의 일을 담당하는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궁녀라했기에,600만명의 인구를 가졌던 백제가 3천명의 궁녀가 있었다는것이 믿을수 없다는것이 무지다.잠자리하는 궁녀라는 개념으로 받아드린다면 말도안되는 숫자이지만,궁녀라는 개념이 그렇게 쓰여진것이 아니라,궁의 일을하는 모든 여자들이라고 받아드리면 이상할것도 없다.



일주일정도 항전하던 사비성의 마지막날 당군이 들이닥쳤을때 당군과 신라군이 백강입구에 도착하여 집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지 3일도 안돼어 먼저 사비성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도망간 의자왕과 귀족계층은 살아남고,왜 궁녀들은 거이 대부분 강물에 몸을 던져을까하는 의문이 생길수도있다.이것은 궁녀라는 직업이 모두 여자였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면 당나라군사들에게 치욕적인 행위를 당하다가 죽거나,노예로 당나라에 끌려가 팔리는 신세가 되어짐을 충분히 예상할수 있었고,오늘날은 조금 개방적으로 되었다는 의견도 있지만,근세에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정조를 중요하게 여겼는데,하물며 왕을 위한 순장까지 명예로운 전통이라고 남아있던 삼국시대에서 이민족에게 정조를 빼기는것은 왕의 아내로 규정되어지는 궁녀라는 신분의 여자들에게는 삶보다 더한 불명예였기에,왕의 여자로 죽는것을 하나도 이상하게 생각함이없이 낙화암에서 몸을 던질수 있었던 것이다.

정말로 낙화암에서 백제의 꽃다운 궁녀들이 강물에 몸을 던져을까? 그런 의문이 든다면,그렇다에 목숨을 걸것인지,아니다에 목숨을 걸것인지 선택하라면,그렇다에 백번이라도 거는것이 지혜로운 판단이라고 할수가 있다.낙화암에서 있었던 궁녀들의 애국혼은 그만큼 신뢰 할수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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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ung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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